1.
2016년도 광주 비엔날레는 ‹제8기후대›라는 주제로 예술로 그릴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긴 탐구과정을 보였다. 다가올 미래들에 대한 수많은 탐구들에서 많은 부분은 시니컬하고 디스토피아적이었다는 인상이 남아있다. 사실 당시 비엔날레에서 스스로 느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인상은 어느정도 지금 현실과 유사하기도 하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 걸까?” — 삼진그룹영어토익반, 2021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우리의 문제들이 한발짝도 해결되지 못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문명의 윤택함에 있다. 인류 문명이 지금까지 이뤄둔 편리성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은 자신이 구축한 편리함을 영속하기 위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의 구축한 업적을 스스로 무너뜨려야만 하는 선택에 놓였다. 내공을 잔뜩 쌓은 무협지의 고수가 더욱 더 높은 경지로 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쌓은 내공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2020년으로 돌아와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은 내공을 차마 버리지 못한 고수에게 이미 당신의 내공은 사라지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인 셈이다. 공공의 보건과 개인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마스크는 처음으로 전 인류에게 닥친 생활의 불편함이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마스크를 벗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마스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환경 속에 던져졌다.
그럼으로 지금까지 문명이 유지한 질서와 편리함에도 보이지 않는 금이 간 셈이다. 더 이상 편리한 채로 남아있을 수 없어. 너희에게도 곧 이 문제들은 도달하게 될 거야.
2.
한편으로 매번 우리에게는 희미한 기대가 흐르고 있다. 20대, 청년, 90년대생, 밀레니엄 세대. 이 막연하고 희미한 기대는 그래도 제법 절실한 것이어서 점차 촉박하고 긴급해져 간다. 저 윗 세대가 우리에게 가지는 희망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과 달리 청년에 대한 기대감의 정체는 사실 거대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정녕 그들은 청년 세대에 대한 이해와 기대감이 있을까? 상권이 죽고 모두가 떠난 골목에 많은 돈과 청년을 데려다 두면, 그곳이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사실 무책임함이 아닐까? 자신들의 과오를 수정하는 미래의 세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철을 따라오는 건실한 청년을 기대한 것은 아닐까?
차별 금지법이 진행되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 문화 전반에서 삶의 다양한 형태는 인정되지 않고, 결혼을 해야하는 것, 일가를 꾸려야하는 것을 모두가 도달할 삶의 목표로 상정하는 태도는 견고해보인다.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하고, 자차를 굴리야만 하는 것 같은. 그 곳에 도달하지 않으면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어떤 허들 같은 것은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 허들을 넘어 결국 우리가 도달할 지점은 어디일까? 행복일까? 삶이 만약 RPG 게임이라면, 이 지속되는 퀘스트 끝에 우리가 만날 것은 무엇인가? 이 사회가 주창하는 삶의 맹목성은 사실 막연한 희망의 세대를 가사 상태로 내모는 것은 아닌가?
3.
다시 불편함으로 돌아가서, 2020년을 불편함의 시대라고 불러 볼 수 있을까. 마스크를 쓰는 것이 불편해 바이러스 전염성을 무시하고, 원피스를 입고 국회의사당에 가는 것이 불편하며, 청년들이 고생을 사서 하지 않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 그러나 적의만으로 세상을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회 조차 박탈당하게 되는 것을 우리 모두는 목격한 바가 있다.
실없는 농담처럼, 타노스가 옳았는지, 다 죽고 나면 해결되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전복해보기로 한다. 다만 한가지라도 다른 것을 선택해보고, 무대에 서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떤 무대라도 만들어보기로 한다. 다수의 목소리에 대해서 대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애기해보기로. 이 살아남은 시체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