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ㄱ’은 도처에 도사리는 많은 의심과 끊임없는 고난의 과정을 딛고,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절대적 ‘믿음’을 원천으로 살아간다. 특히 창작의 행위는 ‘ㄱ’이 믿는 절대자를 섬기는 수단과 같다. 누군가 절대자의 창조물인 자연의 경관을 보며 그 존재를 어렴풋 떠올리듯, 자신의 작품을 또한 그러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신성한 대상이 되거나, 절대자를 대체할 수는 없으리라. 단지 창작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영광을 그에게 돌리고, 그의 가르침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셨듯 그 본을 따라 ‘믿음’의 길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이야기: ‘ㄴ’은 국경 너머 삶으로, 히키코모리로, 문화적 이방인으로, 지나온 삶의 변환 지점에서 자신의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렸을때 오롯이 존재하는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제스처이자 기록으로서 작업을 해왔다. ‘ㄴ’은 최근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를 읽으며 자신과의 공감대를 찾았다고 한다. 이질감으로 가득 찬 사회로부터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던 그에게, 예술은 세상과 삶의 의미와 이유였다. 경제논리에 지배당하는 세상에서 예술이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지만, 삶의 능곡 앞에 선 자신에게 온전한 의미를 주고, 움직이게 했던 예술의 힘을 믿는다. 믿음이란 누군가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에게 유일한 ‘믿음’은 변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변하는 그 순간을 믿는다.
앞선 두 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도착지를 향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믿음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불신, 무구한 의심과 의문을 경유한다. 믿음은 생을 지속하고 지탱하기에는 한없이 연약한 것일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고 유한한 현실을 무한하게 확장하는 이중적인 힘을 가진다.
두 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절대적 믿음과 실존적 믿음은 피상적인 것에 대한 믿음으로 포화한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관통하고 연결 짓고 있기에 그 부정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ㄱ’에게 믿음은 절대적이며 확신에 찬 것이다. 그 절대성은 부정의 과정을 스스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며 만들어낸 실천적 행위의 표상이다. 두 번째, ‘ㄴ’이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자신이 유일하게 믿는 실존적 행위를 통해 변화를 꾀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이 증명해온 믿음은, 결말을 내보일만한 스포일러가 되기엔 이르다.
전시 «태초에 두 개의 이야기»는 작가의 개인적인 신앙이나 믿음을 단순히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전시가 아니다. 목적은 없으나 맹목적이지 않은, 절대적이나 연약한, 그렇기에 의심과 공존하는 믿음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다.
김은택: 김은택 작가의 빛 시리즈는 절대적 믿음의 상징인 빛을 캔버스에 새겨넣는다. 이는 그가 믿는 절대자를 섬기는 수단이며, 부정의 과정을 스스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며 만들어낸 실천적 행위의 표상이다.
나혜원: 나혜원 작가의 회화 시리즈는 지극히 심리적인 영역의 표출을 여러 인물상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설치작업인 연결 시리즈는 변화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과 관계하며 변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