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시감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접했다. 기시감은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는 그 의미와 꼭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였다. 정확한 의미는 기억하지 못한 채 이 단어는 이상하게도 근근이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5·18민주화운동의 주 발생지였던 금남로를 걷던 어느날 강렬하게 느껴지는 기시감에 그 뜻을 찾아보고 또렷이 기억에 남겼다.
5·18민주화운동은 내가 사는 지역, 내가 걷는 길, 나의 주변인이 겪었던 일로 연결되며 아주 서서히 각인되어온 사건이다. 그러나 1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5.18민주화운동을 하나의 사건 혹은 사실로서 이해하고 이를 언급하는 일이 종종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흔히 책이나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지식으로써의 역사 혹은 분명한 감정으로 쉽사리 치환되지 않고 오히려 길 위에서 마주한 시야 혹은 이야기에서 오묘한 기시감으로 다가오곤 했다.
전시 <길 위에서>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불분명한 인식을 지우고 분명히 감각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한 시도이다. 1980년 5월 당시 그리고 직후의 현시할 수도, 재현할 수도 없음은 그 어떤 말을 할 수 조차 없음으로 이어졌다. 신군부의 사건 은닉과 살벌한 언론, 여론 통제 속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일을 금지하고 숨겨야하는 은폐의 국면이 10여년 넘게 지속되었다. 5·18을 겪은 이들-경험자나 목격자라고 할 수 있을-에게 애도의 과정 역시 지체된 과거청산과 함께 박탈되었다. 1997년 5·18이 공식 국가 기념일로 인정받으며 그에 대한 발화와 증언은 자유로워졌으나 이제는 당시로부터 꽤 많은 시간을 지나와 이를 겪지 않은 이들-비경험자와 비목격자라고 할 수 있을-이 더 많아졌으며 계속해서 그러할 것이다. 결국 비경험세대의 몫으로 남겨질 역사에 관해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해야 할까.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말은 재현불가능한 비극 앞에 섰던, 그리고 이제는 그 비극을 뒤로 한 인류의 함묵해야 함과 예술의 무력함을 선고했다. 이처럼 말이 되지 않는 고통과 비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애초에 허락되지도 가능하지도 않는 일인지도 모르기에 말할 수 없는 일이 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게 광주의 5·18 앞에 섰었고, 이제는 그를 뒤로 한채 삶과 예술을 영위하며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매일같이 지나는 길 위에 섰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우리가 지난 역사를 끊임없이 현시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기억과 애도를 위함이 아니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항간에는 사실에 대한 왜곡과 얼토당토 않는 비난이 난무하며 경험세대에게는 N차의 고통을, 새로운 세대에게는 지역에 대한 오인과 낙인으로 혼란을 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대를 아울러 현존하는 부정성에 대항하기 위해 평면적 성격을 가진 텍스트와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전시는 경험세대와 비경험세대가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물리적 장소’를 기점으로 출발한다. 민주정신과 인류애의 발상지였던 광주 각지의 길을 걸으며, 바라보며 발견된 무언가는 작가들의 개별적 사유와 신체표현을 통해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했다. 이는 1980년 과거에서 전시가 이루어지는 현재로 무게추를 옮겨 오며 발화의 주체와 시점을 분명히 상기한다. 출생지에 관계없이 결국은 모두가 비경험자로 남겨질 현재 그리고 미래에 역사가 성역화의 대상 혹은 지난 사회의 잔재로 미뤄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현 세대들에게 관심과 회자의 대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안성석: 안성석은 최근 [미래가 그립나요?](2021, 현대 모터 스튜디오 부산)의 전시에 <어린이>로 참여했다. 그는 여러 개인전 [사적 현재], [사적 경험], [관할 아닌 관할], [내일의 도덕], [인계동 1013-2번지], [따가워], [안성석 렌더러], [어제의 우린 많았지만, 오늘은 혼자다] 등을 통해 자신이 속한 세대와 시대, 국가와 시스템 등에 대해 역사적인 기록과 현실의 상황, 개인적인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을 작품의 주제로 삼는다.
<광주 광장>
광장은 아직 유효한가? 광장은 많은 이들이 모일 수 있도록 넓게 비워진 공간임과 동시에 숱한 사건이 벌어진 역사로 가득한 공간이다. 우리가 직접 디딜 수 있는 광장이나 초고속 통신망을 통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인터넷 둘 다 각각의 프로토콜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환경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는 광장(인터넷)을 통해 제3의 길을 발견하고자 하는 희망의 원리와 한 개인으로서의 현실적 좌절이 기본 골격을 이룬다. 광장이 집단적 삶, 사회적 삶을 상징한다면, 그 반대편에는 개인적 삶, 실존적 삶을 상징하는 것이 곧 밀실(인터넷 터미널에 속하기 위한 신체)이다. 지금의 세대 혹은 미래의 세대에게 광장은 어떤 의미일까? 미래 세대에도 광장의 민주주의가 공감의 영역이 형성되는 장소로 올바르게 기능할까? 개인과 집단 사이의 조화 가능성을 찾거나, 혹은 제3의 길을 찾아서 움직이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윤지영: 윤지영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 개인에게 환경으로 주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 자체나 더 ‘나은’ 상태를 위한 ‘노력’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져 있는 (내부) 구조에도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2021년 12월에 [Yellow Blues_]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최근 참여한 단체전으로는 [젊은 모색 202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하나의 사건] 2020 서울시립미술관, [밤이 낮으로 변할 때] 2019 아트선재센터 등이 있다.
<구의 전개도는 없다>, <달을보듯이보기>
<구의 전개도는 없다>는 참사와 재난에 대한 시간 혹은 공간의 물리적 떨어짐으로 인해 생성된 정보의 오차에 관한 작가의 의구심과 고심, 그리고 죄책감에서 시작되었다. 작품의 제목처럼 구는 수많은 곡률로 인해 전개도를 만들 수 없다. 작가는 캐나다의 3D 스캐닝 회사로부터 얻은 Matt이라는 한 모델의 인체측정학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의 표면을 전개도화한 몰드를 만들어 실리콘으로 떠냈다. 하지만 평면이 된 Matt은 작가가 Matt에게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다시 온전한 입체의 몸으로 재구성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못한 비경험 세대가 그럼에도 갖는 지각과 믿음, 지식의 근거들에 대해 매개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묻는다.
<달을보듯이보기>의 영상 속 작가의 안전은 철봉을 지탱하는 작가의 손과 턱의 고통, 양쪽에서 머리를 잘라주는 사람들의 가위질, 너무 늦지 않게 잘려진 머리카락, 완충 역할을 위해 정확히 조준되어 부숴진 가슴뼈까지 남은 거북이 등껍질로 보장된다. 작가는 무언가의 희생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이 구조 속에서 그 희생의 순환구조와 정당화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윤태준: 윤태준은 1987년생으로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시각 이미지를 제작할 수 있는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 소프트웨어 및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작업으로 생산하고 있다. 신체 기관이 지각하는 특정한 물성의 감각을 시각적 이미지로 제작하고 있다. 동시에 GUI 이미지 소프트웨어로 제작 가능한 디지털 이미지와 사진과의 결합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부산물들을 제작하고 있다.
<전형적인 상징들 Typical symbols>
작가는 꽃, 불, 열매, 손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사진으로 찍거나 3D로 제작하며 5·18민주화운동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에 주목한다. 그중에서도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자들을 기억하고, 지금 여기 그들이 표상되는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들은, ‘령’으로 명명되며 기록된 이야기와 남겨진 이들이 쓴 다양한 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단어를 추출하고 결합, 충돌시키는 과정을 통해 사진과 3D로 드러난다.
이은영: 이은영은 특정 장소나 상황 속에서 떠올린 ‘실제 했으나 사라진 것’에 대한 심상을 시적 은유와 공감각적 시각화하여 조형화하는 방식을 다층적으로 탐구하고 그 의미를 탐색해오고 있다. 오래된 묘지, 주인을 잃은 공간과 사물, 일상에서 마주치는 희미한 기억의 흔적,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같은, 즉 실제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치부되었기에 또렷이 형상화되지 못한 대상들에 얽혀 있는 감각과 기억의 파편들을 끌어올리고 드러내는, 그럼으로써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와 의미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사이의 서사>
5·18민주화운동의 비경험 세대인 작가는 학창 시절 학습하고 전해 들었던 이야기, 성인이 되어 방문한 광주에서 경험하게 된 현재의 광주의 모습, 경험세대가 남긴 증언록을 읽어가며 알게 된 것을 다층적으로 받아들이며 시각화하고자 한다. 접힘과 주름은 사라진 것들, 감춰진 것들, 잊혀진 것들에 대한 환유이다.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간단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접힘과 주름 때문에 사라지고 잊혀졌음의 비유이기도 하다. 주름을 펼친다면 그것들은 다시 되찾아질 수도 있고, 온전함을 잃어버렸다고 하여도 어쩌면 더 많은 의미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분명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이 사소한 접힘과 주름에 의해서 쉽사리 잊혀질 수 있음에 대한 이야기이고자 한다. 정치적 극단주의의 사이사이에, 문화적 스펙터클의 이면에 분명 수많은 접힘과 주름들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러한 수많은 접힘과 주름들 사이에서 발화되지 못한 채 놓여진 새로운 (혹은 이제서야 발견된) 의미와 이야기들이 존재함을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정한결: 정한결은 사진과 영상을 주매체로 작업하며 이미지와 다른 미디어 매체를 결합하는 방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개인의 삶과 사회의 불편함과 분노가 주된 추진력으로 작업을 해 나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기만된 자유’는요즘의 관심사와 작업 주제로 역사의 일부에서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와 개인적인 사건의 일부를 재해석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기록된 이미지와 텍스트를 이용한 작업에 흥미를 가지고 이미지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기억의 환경들 : [머물 수 없는 집]>
광주에서 생계와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작가에게 곳곳에 산재한 5.18의 흔적은 때로는 무심하며, 때로는 여러 감정과 혼재하며 내재되어왔다. 완전히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비경험 세대에게 하나의 역사는 그렇게 지나간 것처럼 보이나 그럼에도 그 시간을 만들었던 사람들과 공간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으며, 항쟁지였던 광주의 많은 공간들이 역사 위 하나의 점으로 맺혀 연결되어있다. 이 지점과 선상에서 공간들이 담고 있는 기억의 이야기: ‘기록텍스트’와 현재 광주의 공간과 기념물 이미지들이 작업의 기반이 된다. 공간이 갖는 역사적 정체성의 이미지화에 대한 작가의 물음은 5.18 관련 공간들을 설명하는 증언텍스트, 기록텍스트, 이미지들의 조합과 가공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시간으로 인한 망각을 이야기하고 서로 다른 시점과 공간의 이면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