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다»

2022. 10. 11 - 2022. 10. 27

인권단체 협력사업 반성매매 기획전시
장소: 산수싸리
작가: 김유나, 박화연, 정유승, 자활지원센터 다힘, 청소녀지원시설 푸른꿈터
기획: 산수싸리
주관: (사)광주여성인권지원센터
후원: 광주광역시

불투명한 투명

수조에 담긴 물을 지면 삼아 글을 쓰는 상상을 했다. 글자는 커녕 한 획의 흔적도 남지 않겠지만 계속해서 쓰다 보면 결국은 투명한 물에 색이라도 얹어볼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수조의 크기가 얼마나 되냐는 것이다. 수조 벽의 면적이 넓으면 넓을 수록 무척이나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지난 3년간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반성매매 기획전시에 참여하며 문득 문득 느꼈던 그 지난함, 그리고 그 지난함을 굳건히도 이끌어가고 있는 센터의 여성들. 나에게는 물음표와 상상으로 맺어지는 이 문장들이 그들에게는 느낌표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물론 어떤 것도 감히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수조의 수준이 아닌 적게 가늠하여도 광주천 정도는 될 듯한 물길의 끄트머리에서 끊임 없이 그들의 문장을 적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예술을 도구 삼아 적어낸 각색의 문장이 더해지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올해의 전시를 준비하며 참여작가 3인과 기획팀(산수싸리), 여성인권지원센터는 지난 3개월간 책과 여러 자료들을 찾아 읽어가며 각자의 지각과 감각을 깨워갔고, 말미에는 센터의 정기활동인 아웃리치 — 성매매 업소를 직접 찾아가 종사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고 지원체계를 홍보하는 일 — 에 참여했다. 그런데 한발짝 떨어져 보았을 때는 투명하기 짝이 없어 담긴 그릇 밖에는 탓할 도리가 없던 그 액체 위에 무던히도 잉크를 뿌리던 여성들이 사실은 물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마치 한치의 틈도 없는 듯한 콘크리트 지면을 파고들고 스며드는 물길과 같았다. 사실과 본질을 타진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불가능과 같은 ‘물 위에 글쓰기’가 아니라 스스로 물길이 되어 땅을 적시고 있던 것이다.

전시 «블라인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다»의 김유나, 박화연, 정유승 작가의 작품 속에서 그 유약한 물성이 강인함으로 치환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함께 스며들 방향의 단서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How (I/See/You/Want)›

김유나는 일상적으로 산재한 성매매에 대한 선입견에 주목한다. 한국사회의 성매매 문화에는 유독 표면적인 현상이나 왜곡된 사실에 의해 형성된 선입견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비단 성매매 이슈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 상황 속 공동체의 존재와 그 속 개인의 역할에 대한 이질감과 의구심을 기반으로 작품을 통한 자의적 질문을 던진다. ‹How› 시리즈에 등장하는 형형색색의 아크릴판은 성별, 종교, 인종 등 광의적 차원의 공동체 속 개별적인 시선의 표상이다. 아울러 개인적 가치관의 인식과 동시에 사회적 현상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기저에 깔린 선입견 혹은 편견, 나아가 오인과 낙인을 야기하는 갖가지 시선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고정되지 않은 채로 타인의 손길에 의해 무작위하게 변화하는 아크릴의 색과 모양새는 겉보기에 모두 같지만 지극히 다른, 쉬이 합치될 수 없는 본질과 실제, 자의와 타의, 그에 따른 혼란의 적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장치는 원화가 가진 무채색과 형태를 일부 가리게 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되려 그 원화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은닉되고 변질되어가는 본질에 대한 직시를 독려하는 김유나의 역설적 발화이다.

김유나는 회화를 기반으로 작업하고 있으나 특정한 소재나 장르를 한정하여 작업하기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메세지를 풀어낸다. 작품을 자신과 사회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인식하며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발설하기도, 숨기기도, 지우기도 한다. 최근에는 자신의 본연적 시선을 탐구하며 얻어낸 메세지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 중이다.

 

‹궁극의 터전›, ‹도시의 첨부문서›, ‹양동 2018-2022›

1950년대 이후 광주를 배경으로 성매매의 지역적, 역사적 양상과 그 풍경에 관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 중 2021년 ‘학동 철거건물 붕괴참사’로 매체에 소개되었던 학동 삼거리는 40여년의 역사를 지닌 성매매 집결지였다. 약 10년의 긴 기간 동안 폐쇄 대상지였던 학동의 풍경이 거대한 참사로 인해 전국적으로 노출되면서, 광주광역시의 숙원사업이자 소위 도시의 흉물이었던 학동의 집결지는 급진적인 삭제와 동시에 공원으로 변모하였다. 작가는 이처럼 도시의 한 켠에서 반복되는 낙후 건축물을 비롯한 지역, 토지 등의 지속적 철거와 정제, 그리고 감쪽같은 도시 미화의 과정을 조명한다. 특히 전시가 열리고 있는 현재(2022년 10월) 양동 닭전머리 구간은 사라진 업소를 대체하는 점집들이 들어섰고, 일부 성매매 집결지는 철거 공사가 진행중이다. 사라진 집결지 규모와 비례하게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도시의 법칙에 따라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들의 행방은 마치 철거 중장비가 업소 건물을 부수고 난 뒤 흙과 뒤섞여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잔해 조각만큼이나 묘연했다. 정유승은 추적이 불가한 조건 속에서 남겨지고 버려진 것으로부터 이들의 안부와 행적에 다다르기를 시도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삶에서 보장된 터전에서 밀려나 그들은 어디를 향해 갔을까. 작가는 잔뜩 뒤엉켜 쌓인 터전에서 바라본 매끄러운 도시의 풍경 속 더욱 지독히 느껴지는 고독을 영상으로 기록한다.

정유승은 지역에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청년 담론을 시작으로 사회적인 낙인과 인권유린이 박제된 존재와 공간을 모색한다. 주로 광주지역 성매매 집결지의 생태를 가시화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기록한 감각들을 영상과 설치작업으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을 하는 사람›

‘성매매’라는 단어가 직관적으로 연상시키는 것은 대개 그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이미지인 경우가 대다수다. 박화연은 이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성매매 문화에 관한 편협한 인식의 틀에 천착하여 잘못된 인식의 근원을 찾고 결과적으로 점진적이나마 변화를 꾀하기 위한 작업을 선보인다. 특히 성매매 산업 시스템 속에서 착취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삶과 신체가 아닌, 문제의 근본적 원인인 착취의 주체와 그 사회적 배경을 추적해 보여준다. 작가는 전시의 준비과정에서 얻은 다양한 사실정보와 함께 탈성매매 여성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실제 성매매 업소의 착취 행태를 비롯해 여성의 신체가 재원 혹은 담보 사용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사적 배경과 이를 강제적으로 지속시키는 성매매 산업의 악질적 부채시스템을 구체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계기였다.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은 결국 자본주의경제와 한국역사상 자본 순환의 핵심이었던 가부장사회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전시장 내 작은 방안을 둘러싼 거울은 영상이 재생되는 모니터와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의 모습을 무한히 복제하며, 뿌리 깊은 착취 구조와 착취자들 / 여전히 소비되고 소외되어가는 여성의 신체 / 이를 바라보는 혹은 방치하는 사회적 시선이 공존하는 모습을 여실히 담아낸다.

박화연은 한국화를 전공하여 장지에 채색 기법으로 기억의 흔적들을 표현해 왔다. 그림을 채워나갔던 수십, 수백 번의 터치는 곧 광주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을 만나는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항쟁, 노동, 여성 그리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가 있는 현장 속에서 마주하고 발견한 것들을 담아내며 현재는 영상, 설치의 방식으로 작업을 전하고 있다.